인문학과 문화산업의 발전
김평수 연구소장
법정에 끌려나온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가 법정에 끌려나왔다. 죄목은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믿어 국가의 신을 모독했다는 것과 청년들을 부추겨 헛된 생각을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그는 소피스트들의 모함에 빠져 법정에 서게 되고 자신을 입장을 변호해야 했다. 법정에서 소크라테스의 자기변론을 제자들이 기록한 책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들이 믿는 신은 시장경제이다. 우리가 시장경제의 전지전능함에 회의하거나 청년들에게 기능인이 되기보다 창의적인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가정해보자. 소크라테스의 시대였다면 법정에 서야했고 독배를 마셔야 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인문학이 처한 현실은 법정에 끌려나온 소크라테스와 다르지 않다. 인문학은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법정에서 소크라테스처럼 자신의 존재이유를 변호해야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인문학이 위기상황에 놓여 있다는 인문학 위기론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시장에서 인간의 기능적 능력만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가치질서와 인간의 사유와 창의성을 중시하는 인문학의 대립은 이미 예측되어온 사실이다. 자본주의 시장의 질서는 인문적 가치를 외면하고 기능인으로서의 사람들만을 필요한 존재로 인식한다. 우리의 사회가 이렇게 변화되어 가는 것이 합당한지, 그리고 그 대안은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는 답변해야 하는 순간에 도달해 있다. 그 순간은 피할 수 없는 바로 지금이다.
근대에서 인문학은 무엇이었나?
인문(人文)을 글자 그대로 '사람의 무늬'라고도 한다. 그러니 인문학을 인생에 대한 물음과 해답이라 보기도 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인생에 대한 물음과 해답이지만 어디까지나 인생에 관한 ‘텍스트’를 붙잡아야 한다. 문학 텍스트, 역사 텍스트, 철학 텍스트 그러니까 문사철(文史哲)이란 '문사철 텍스트'의 줄임말이다. 인문은 '사람과 텍스트' 또는 '인생과 텍스트'다. 그 텍스트를 가지고 인문학이 무엇인지, 자기가 하는 일이 뭔지 되묻는 것이 인문학의 가장 인문학다운 일이다. 텍스트 없는 물음은 맹목이고 물음 없는 텍스트는 공허하다. “배움과 생각 중 하나라도 소홀하면 아니 된다”고 했다.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배움이란 텍스트를 배우는 것이다. 생각이란 텍스트에 질문을 던져 뜻을 찾는 중에 나온다. 텍스트와 생각은 서로 수반(隨伴)하며 변증하는 사이다. 인문학은 사람과 텍스트(人文) 사이에서 사람에 관해 묻고(人問) 사람의 말을 경청(人聞)한다. 인문학의 위기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기를 멈춘 순간 찾아오기 시작했다. 바로 시장과 자본의 폭주 앞에 멈칫한 순간이다.인문학의 위기 상황이 벌어진 것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인문학이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 동안 인문학은 안이하게 자신의 영역이라고 믿어지는 것에만 집착한 경향이 있었다. 특정한 시대를 설명하고 이끌기 위해 설정된 이론들을 시대를 초월한 보편 담론으로 인식 변화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립을 자초한 것은 아닌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인문학은 현재 활동하고 있는, 실재의 인간을 외면하고 이상적 유형의 인간에 지나치게 집착하기도 해왔고 정신과 물질을 배태관계로 설정하여 현실에 작동하는 많은 것들을 무시한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인문학의 자기반성을 통해 나온 유효한 문제의식이지만 인문학의 위기 전체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존재는 언제나 내부와 외부의 경계 속에 형성된다. 위기라는 양질전환의 순간까지 축적된 내면과 더불어 사회 환경 변화의 산물이 결합해서 나타난 상황이 인문학의 위기라 할 수 있다.
혹자는 인문학의 비실용적과 인문학의 비근대성(비현대성) 때문에 인문학이 위기에 빠졌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인문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분명 인문학의 위기는 분명하다.
근대(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서면서 모든 것들의 가치가 화폐로 정립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실용성은 이 사회에서 중요하다. 현대사회에서 실용성은 곧, 돈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인문학으로는 돈벌이가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인문학의 성찰이 과연 화폐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대학에서부터 나타났다. 사회의 잘못된 분위기를 지적하고 올바른 길을 가야할 대학이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적 정신을 추종한다. 대학이 먼저 실용성을 이유로 인문학을 소외시키고 간판 바꿔달기를 강요한다. 취업률에 따라 학과들 사이에 서열이 매겨지고 지원자가 부족한 인문학과들은 통폐합 또는 폐과가 된다. 산학 협력이 더욱 강조되고 대학의 국제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영어강의도 확산된다. 지성의 요람인 대학에서도 인문학을 소외시킨다. 하물며 물적 가치와 동일한 욕망만을 추구하며 달려가는 사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인문학은 이러한 현상 속에서 자발적, 비자발적으로 소외된 학문이다. 소외되었기에 당당하게 오늘날을 현실을 성찰할 자격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의 위기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비실용성과 비근대성이 인문학의 위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문학은 근대에 적응하지 못한 비실용적적인 학문이라는 것은 인문학의 역사적 역할을 통찰하지 못한 탓이다. 인문학은 근대와 담을 쌓은 존재가 아니었다.
인문학은 한때 시정잡배가 아니라 엘리트를 양산하기 이한 상류층 문화의 옹호자였다. 고급 문학과 우아한 클래식을 소비하고 권위를 모방하는 품위 있는 삶을 교양의 이름으로 전수하는 제도적 장치의 일부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인문학은 중세를 마감하고 인간 중심의 세속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근대적 과하기술의 대변인이기도 했다. 인문학이 자연지배의 후원자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더 나아가 인문학은 민족 국가의 인프라 구축을 총지휘하는 이론적 지원자였다. 역사의 연속성을 정립하고 공동의 상상체계를 만들어 내며, 한 나라의 정식적 위대함을 각인시키는 작업의 선봉에는 언제나 인문학이 놓여 있었다. 누구도 인문학이 근대 사회의 이데올로기 생산 및 재생산 구조와 무관하다고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흔히 실용학문의 대표격으로 언급되는 학문은 경영학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영학조차 그의 큰 뿌리는 인문학에 두고 있다. 경영학의 경영이라는 말의 대상에는 돈을 포함한 자원과 같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기업과 조직, 즉 인간도 있다. 인간을 경영하기 위한 학문적 근거를 경영학은 심리학에서 찾는다. 실용학문인 경영학이 비실용적인 인문학을 바탕으로 세워진 것이다. 오늘날 CEO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좌의 열품이 불고 있음은 이를 반증한다. 자본의 가치만을 추구하는 실용의 최극단에서 결국은 인문학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인문학을 찾고 있다.
또한 인문학은 오래됐으며 전근대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자연과학과 기술이 근대성을 일구어 왔다는 점에서 이들이 근대적인 것이라면, 근대성의 문제점을 성찰하는 인문학 역시 근대적이다. 관계학이라는 관점에서의 인문학을 이야기해보자면 현대사회에도 인간과 세상은 존재하고 이를 성찰하기에 인문학은 현대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흔히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대립적으로 생각한다. 이는 그릇된 접근이다. 인문학은 정신과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한때 인문'과학'으로 불리기도 했다. 역사적인 순서로 볼 때, 인문학은 우리가 현대적이며 합리적임을 의심하지 않는 자연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발생되었다.
현대기술의 발달로 우리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현대화의 정도가 우리의 삶의 질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다. 첨단과학과 기술의 부작용이 인간을 하나의 부품으로 보며 그 부품을 모두 중립화, 획일화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개성과 정체성을 논하는 인문학은 반드시 필요하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근대화가 진행 될수록 세계를 성찰하는 인문학은 더더욱 불가피했다. 결국, 오늘날 우리가 맞이한 인문학의 위기란 인문학 자체의 근본적 한계라기보다는 새로운 시대적 사명과 요구를 부여받고 있는 상황에서 생긴 혼란이라고 보아야 한다.
예술의 상품화, 상품의 예술화
인문의 기본이 되는 예술과 문화산업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예술의 순수성과 아우라를 옹호하는 인문 진영과 문화산업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산업 진영의 대립으로 표면화 되어 있다. 문화산업에 비판적인 예술가 진영은 문화산업이 예술을 세속화시키고 상품화하여 결과적으로 예술과 문화 자체를 타락시키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산업화 진영은 문화산업이 문화향유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저렴한 비용으로 충족시켜주고 문화의 저변을 확대시키며 예술가들에게 예술창작의 동기를 부여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예술에게 혹은 인간에게 문화산업은 어떤 의미일까? 이 근원적인 질문에 한마디로 대답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예술과 문화가 인간에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예술이 대중문화라는 이름으로 상업주의와 결합하게 되는 역사적 과정에 대한 설명은 물론, 대중문화산업이 경제영역의 변방에서 중심부로 이동하게 된 배경을 살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화산업이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이르기까지 모든 원인과 결과들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검토 과정을 거친다고 해도 대중문화산업이 예술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것인지 확장하는 것인지 혹은 인간에게 이롭게 작용하는지 인간의 감성을 타락시키는지를 윤리적 기준으로 정의하기 어렵다.
공동체를 이루는 인간의 삶에는 문화가 있다. 문화는 인간과 동물은 물론, 인간집단 사이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고유한 기표의 영역이다. 최소한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고 도구를 활용하기 시작하는 수만 년 전부터 자연스럽게 문화를 형성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문화가 공동체 속에서 생겨났음은 2만 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벽화 속 들소 그림을 통해 그 사회가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종교적 행위와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활동은 사회적 소통을 위한 목적이라 볼 수 있다. 흔히 원시적 공동체 사회에서의 문화를 저열한 것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기 쉬운데 이것은 현대적 편견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의 문화는 우열을 가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그것을 구분하려는 것은 서양중심적인 사고이며 야만적 사고’라고 말했다. 결국 문화란 정신적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의 총체적 활동의 결과이기에 동서양의 우위를 가린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이에 반해 산업이란 우위를 가릴 수 있다. 산업 활동이란 자연 속에서 물질적 가치를 발굴, 생산해서 판매하는 활동이다. ‘문화’라는 정신적 가치와 ‘산업’이라는 물질적 가치는 서로 조화되기보다는 대립적이고 분리된 기표로 인식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산업구조가 고도화되고 대중의 소비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문화적 욕구가 확장된다. 이에 대중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예술적 창작물이 산업적인 대상으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대중문화가 상업주의와 결합하며 대규모의 상품시장을 형성하기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문화를 경제활동의 대상으로 삼아 산업화한 것이 바로 문화산업이다.
문화의 산업화란 시나리오‧희곡‧문화재 등 유‧무형의 지적 창작물을 영화‧비디오‧공연상품‧컴퓨터게임 등과 같은 문화상품으로 생산하여,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시장에 출시해 놓는 것을 의미한다. 즉, 문화산업이란 예술작품을 상품이자 재화로 취급하여 시장에서 거래하는 것이다. 특히 일부 특정 계층이 아닌 일반 대중의 정서적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상품과 서비스를 대량으로 생산, 유통, 소비시키는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문화산업은 창조적 작품의 세계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복제 및 유통의 세계로 확장된다.
기술의 복제로 대중문화예술이 보편화된 오늘날은 벤야민이 생각했던 것처럼 예술이 민주화된 시대인가? 아니면 아도르노가 일갈하던 것처럼 대중기만의 시대인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대중문화산업을 향한 윤리적 질문의 뿌리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이론의 가장 탁월한 저서 『계몽의 변증법 Dialektik der Aufklärung』에 근원이 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아도르노가 말한 ‘문화산업’으로 돌아가 다시 질문해 보는 것은 비록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도르노는 대중문화를 아기음식에 비유했다. 아기 음식이란 먹기 쉽고 소화가 잘되어야 한다. 이처럼 대중문화의 산물은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될 수 있도록 ‘미리 소화된’ 재료만 반복해서 사용한다. 이를테면 TV 드라마가 천편일률적인 주제를 가지고 거의 동어반복 수준의 드라마를 반복적으로 생산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수십 년 전의 드라마나 오늘날의 드라마는 주제나 그 전개방식에 있어서 별다른 변화가 없는데 이는 주 시청자의 특성과 정서에 부합하는 주제를 계속 반복하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이것을 “동일한 것의 영원한 자기반영”이라고 말한다.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21세기인 오늘날 문화산업의 거대한 흐름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새로운 매체를 탄생시키고 새로운 매체들을 통해 공장에서 생산된 상품처럼 예술작품이 무한반복 무한복제 되는 세상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아도르노가 그토록 경계하던 문화산업은 문화콘텐츠산업, 엔터테인먼트 산업, 대중문화산업, 창의산업 혹은 창조산업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경제의 변방에서 중심부로 한발 한발 들어서고 있다. 문화산업은 이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호명되지만 결국 그것을 규정하고 있는 본질은 같다. 문화예술이 재화로 서비스된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문화산업은 산업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자 신성장동력 산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경제적 변화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산업이 대중들의 삶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모든 사회적 문화적 트렌드는 대중문화를 통해 전파되고 대중들은 이를 소비한다.
디지털 매체에는 작품의 감상보다 참여와 행위의 과정이 중시된다. 컴퓨터 게임을 할
때 게이머는 자신의 능력과 취향에 따라 다른 점수와 스토리를 만들어간다. 여기에 보존과 축적보다는 생산과 소비의 성향을 지니는 하이퍼텍스트의 매체적 특성에 맞게 게임은 한바탕의 놀이로 끝나버린다. 누구도 자신의 게임 스토리를 보관하여 두고두고 관조하려 하지 않는다. 이로서 예술의 보존가치는 사라지고 소비되는 한바탕의 행위로 변한다.
이제 예술은 이미 상품화를 피할 수 없다. 작품이라는 이름의 문화콘텐츠는 생산하는 순간 교환가치를 발생시킨다. 그 작품을 대중이 접촉하기 위해서는 교환가치에 상응하는 화폐를 지불하고 소비해야한다. 그 단계를 넘어서면 교환가치를 높이기 위해 상품도 예술화를 추구한다. 예술이 대중들의 기호로 선택되는 상품일 뿐만 아니라 상품도 예술적으로 승화된다.
자본주의의 상품 수요, 공급 논리에 자체가 인간을 소외시키고 타락시킨다는 아도르노의 입장을 예술의 존립 근거로 삼는 것은 그 유효성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대중문화가 “대중기만의 도구”라는 아도르노의 주장을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아도르노의 논리에 따르면 대중이 대중문화를 즐기는 것은 우선 스스로 노예화되는 것이다. 이 논리가 오늘날 전 세계 대중에게 적용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기술로 인한 예술작품의 복제가 예술의 아우라를 상실하게 만들었지만 이것은 예술을 소수에게서 해방시켜 대중에게 돌려줄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아도르노는 ‘영화’가 동일한 내용을 반복함으로써 대중의 의식을 마비시킨다고 하지만 벤야민은 기술복제의 예술로서 영화가 몽타주라는 형식원리를 통해 대중의 충격과 각성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대중을 집단적 주체로 형성시키는데 기여한다고 말한다. TV와 라디오같은 매체가 아도르노적 관점에 부합한다면 인터넷과 뉴미디어 같은 쌍방향성 매체는 벤야민의 관점에 부합한다.
문화산업과 인문학 발전의 변증법
오늘날 한 사회의 고유한 정체성을 의미하는 문화의 정의는 점차 그 의미가 약화되고 있다. 문화는 단위사회나 단위국가의 경계를 넘어서서 확장되고 융합되어 새로운 형태로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있으며 그 변화의 속도는 급속도로 빨라지고 있다. 하루만 지나면 새로운 문화 트렌드가 우리의 삶과 사회를 장악하고 있음을 도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피부로 느낄 것이다. 우리들은 세상의 문화 속에서 자라고 문화를 향유하지만 너무 빠른 문화적 변화 속에서 문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끝없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나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세계는 인식의 속도를 앞지르는 변화 속에 있고 우리는 그 세계의 구성원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정체성을 정의내리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다른 세계에 진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우리의 존재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 그림자만을 쫓게 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의 경계는 어디까지인지 모른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우리의 문화는 진정 우리의 것인가? 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문화를 바꿀 수 있는 것일까?
2차 대전을 겪은 아도르노는 대중혁명에 대한 신념을 상실한 채 계몽의 변증법을 썼다. 결론적으로 아도르노는 대중문화의 생산자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고 대중의 의식성과 자발성에 대해 지나치게 폄훼했다는 지적은 유의미하다. 반복적인 인수합병을 통해 탄생한 초거대 문화자본이 거의 모든 문화산업의 영역을 지배하는 21세기다.
하지만 오늘날 대중문화가 산업논리에 의해 생산되기는 하지만 대중은 그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기도 하고 스스로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생산하기도 한다. 대중은 무기력한 수용자만이 아니라 적극적인 수용자이자 창조자로도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전 세계적 변화의 흐름 속에서 인문학은 쌍방향성을 추구하는 미래사회의 미디어와 문화산업의 방향을 잡아나갈 나침반의 역할을 하는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인문학은 새로운 뉴미디어가 초래할 ‘위험’에 대해 통찰해야 한다. 동시에 뉴미디어 사회의 새로운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주목하고 참여해야 한다.
모든 예술작품은 대중들이 소비하는 예술상품으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대중문화는 문화예술 인문적 토양 속에서 ‘작품’으로 탄생하고 ‘상품’으로 대중들에게 선택되는 운명을 갖는다. 미국의 자유와 평화의 인문정신이 넘치는 우드스탁 페스티벌 시절 미국의 대중문화가 가장 꽃피었던 점을 상기해보자. 문화산업은 인문학의 르네상스 속에서 발전할 수밖에 없다.